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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경묘, 영경묘

 

준경묘, 영경묘 (濬慶墓,永慶墓)

 

•준경묘 :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산 149번지(시도기념물 43호)

•영경묘 : 삼척시 미로면 하사전리 산 53번지

 

준경묘(濬慶墓)는 조선 태조(이성계)의 5대조인 양무장군(陽茂將軍)의 묘로 인근 약 4㎞ 하사전리에 양무장군의 부인 이씨의 묘인 영경묘(永慶墓)가 있다.

 

매해 4월 20일 청명일(淸明日) 후손 봉향회가 주관하는 청명제(淸明祭)를 통해 제향을 지내고 있으며,역사의 현장을 확인하고자 참여하는 일반시민도 함께 참반하고 있다.

 

활기리에는 목조대왕이 살던 집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무장군 내외분의 묘소를 준경묘.영경묘로 추존할 때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 舊居遺址碑)”를 세웠는데, 고종태황제 어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준경묘. 영경묘. 재실. 목조대왕 구거유지 등을 합쳐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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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고종 36, 광무 3) 4월 16일 어명 으로 정승 "리중하"가 활기리에 파견되어 전해오는 묘소의 지도와 기록을 증험하여 970정보의 산림에 경계를 정하고, 표목을 세워 준경묘, 영경묘를 다시 봉축했다.

 

재각(齋閣:제사를 지내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머무는 공간 또는 제사 에 필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공간),제실 (祭室)·비각(碑閣)과, 홍살문을 세웠으며 영경묘, 준경묘라고 묘호를 정했다.

 

또 그 해 11월 27일 구거지 비각(목조대왕 구거 지)을 건립했으며 이로부터 관원을 두어 수직토록 조치하고 년 1회씩 제향을 봉행토록 하여 현재에 이르며 당시 마을 노인들의 고증에 의해 영경묘, 준경묘를 찾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살활(活) 늙을기(耆) 즉, 활기(活耆)리로 명명 했다.

 

준경묘 앞에 위치한 재각은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선이 옆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이 재각은 왕릉에 세워지는 정(丁)자형이 아니라 단순한 일(一)자형으로 되어 있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소나무(금강송) 숲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경치가 좋은 곳이며, 이곳의 소나무들은 숭례문, 광화문 복원 때 자재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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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경묘)

 

 

양무(陽茂)-장군(將軍)

 

始 16세 인공의 아들로 이름은 양무이며, 벼슬은 장군을 지내셨다.

배위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강제(李康濟)의 딸 이씨다.

“장군”이란 벼슬은 고려시대에는 무관의 정4품 벼슬로 “대장군=종3품”, 중랑장=정5품)의 중간 직위이다.

 

전주에 살다가 아들인 목조대왕 안사(安社)의 삼척 이주 때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로 옮겨 왔고, 거기에서 1231년(고려 고종 18년)에 하세하여 현 미로면 활기리(活耆里) 92번지 노동(蘆洞) 신좌을향(辛坐乙向) 준경묘(濬慶墓)에 모셔져 있다. 배위 이씨도 미로면 동산리(東山里) 산53번지 묘좌유향(卯坐酉向) 영경묘(永慶墓)에 모셔져 있다.

 

슬하에는 네분의 아드님을 두셨다.

1子-영필(英弼), 2子-영밀(英謐), 3子-영습(英襲)=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4子-목조대왕(穆祖大王) 안사(安社)이시다. 영습공만 후사를 두어 선원선계 세번째 파계인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줄여서 주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백우 금관(白牛 金棺) 설화

 

 

활기리에서 앞재를 넘어 준경묘에 이르면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신좌을향으로 양무장군의 묘가 모셔져 있는데,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 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세를 보면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므로 전주리씨 후손은 장손들이 허약하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160여 년 전에 양무장군께서 이곳에서 돌아가시자, 목조대왕께서는 선친의 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나무하러 두타산으로 올라갔던 집의 일꾼이 나무를 하다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도승과 상좌승이 앉아 산맥을 보며, “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도승의 말을 듣고, 나무하다 말고 뛰어 내려와 주인인 목조대왕에게 알렸다.

 

목조대왕은 급히 달려가 도승 일행을 만나 백방으로 간청하니, 그 도승이 그 자리를 가리켜 주는데, 대신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다. 곧 개토제(開土祭) 때 소 1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관은 금관을 써야 효험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에 편법을 쓰기로 하였다. 곧 처가에 마침 흰소가 한 마리 있어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체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 형편이 못 되니 황금 빛깔의 밀짚(일설에는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에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우금관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신하여 1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했다고도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도합 5백년의 조선왕조의 수명이 되 었다고도 한다. 준경묘 자리는 오늘날도 풍수를 따지는 사람은 우리 나라 제일의 명당으로 이해하고 있다.

 

`장군'이란 벼슬은 고려시대에는 무관의 정4품 벼슬로 `대장군'(종3품)과 `중랑장(中郞將 : 정5품)'의 중간 직위이다.

 

 

 

영경묘(永慶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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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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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각과 비각)

 

▣부속문화재

묘    (시도기념물 43-1)

재각 (시도기념물 43-2)

비각 (시도기념물 43-3)

비    (시도기념물 43-4)

재실 (시도기념물 43-5)